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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 없는 사랑, 그 공허함에 대하여

한국교회공보 기자
작성일 2026-07-27 07:10

본문

사랑은 기독교 신앙의 대강령이자 교회의 존재 이유다. 그러나 그 사랑이 구체적인 '행함'으로 번역되지 않을 때, 그것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 마크 아놀드가 제안한 '귀마개 구비'나 '손 장난감 제공'과 같은 작은 실천들은, 한국 교회가 그동안 얼마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사랑에 머물러 있었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많은 교회가 '이웃 사랑'을 설교하고 '섬김'을 구호로 외치지만, 정작 신경다양성을 가진 한 아이가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고 내는 작은 소음조차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아이의 부모가 느끼는 죄책감과 위축감은 교회가 선포하는 사랑의 메시지를 공허하게 만든다. 이는 단순히 이해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을 실천적 언어로 번역하는 데 실패한 신앙의 현주소다.

19세기 벨기에의 사제였던 다미앵(Father Damien) 신부는 하와이 몰로카이섬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쳤다. 그는 멀리서 안전하게 구호품을 던져주거나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직접 그들 가운데로 들어가 함께 살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의 사랑은 손에 흙을 묻히고 피고름을 닦아내는 구체적인 행위였다. 결국 그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그곳에 뼈를 묻었지만, 그의 삶은 행함으로 증명된 사랑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역사가 되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서 2:15-17). 장애 아동과 그 가족을 향한 교회의 포용성은 더 이상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믿음의 진실성을 가늠하는 시금석이자, 죽은 믿음과 살아있는 믿음을 구별하는 명확한 기준이다. 교회의 예산과 인력을 할애하여 '포용성 담당관'을 세우는 일은, 우리의 사랑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최소한의 행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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