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戰線) 위에 선 교회, 역사의 파도를 넘어서 > 사설 > 한국교회공보

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사설

HOME  >  오피니언  >  사설

전선(戰線) 위에 선 교회, 역사의 파도를 넘어서

한국교회공보 기자
작성일 2026-09-02 07:10

본문

인류의 역사는 포성과 연기가 자욱한 전쟁의 역사이자, 진리를 둘러싼 치열한 사상의 역사이며, 보이지 않는 우상과 싸워온 영적 투쟁의 역사다. 오늘 우리에게 당도한 세 편의 소식은 이 세 가지 전선이 동시대에 엄연히 존재하며, 교회는 그 모든 싸움의 한복판에 서 있음을 묵묵히 증언한다.

우크라이나의 폐허 속에서 들려오는 기독교 사역 시설의 파괴 소식과 노인들의 비참한 죽음은 죄악이 관영한 세상의 실체를 남김없이 보여준다. 포탄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은 무너진 건물더미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엄한 생명이 무참히 짓밟히는 현장이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세상의 고통에 동참하는 겟세마네 동산이다. 교회는 이 물리적 전선 위에서 안온한 평화를 구가하는 방관자가 아니라, 깨지고 상한 세상의 신음소리를 끌어안고 중보하며, 피 흘리는 이웃의 상처를 싸매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부름받았다.

한편, 로마 가톨릭과 복음주의 카리스마 진영의 연합 시도는 우리를 신학적 전선으로 이끈다. ‘성령 안에서의 일치’라는 감미로운 구호 아래, 진리의 핵심을 흐리는 연합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허무는 행위다. 4세기 아리우스주의의 거센 파도 앞에서 ‘아타나시우스 콘트라 문둠(Athanasius contra mundum)’, 즉 ‘세상을 대적한 아타나시우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그는 홀로 삼위일체 교리를 수호했다. 다수가 틀렸고 소수가 옳을 수 있음을 역사는 증명한다. 참된 연합은 인간적 열정이나 신비적 체험의 공유가 아닌,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엡 2:20) 진리의 반석 위에서만 가능하다. 교회는 이 신학적 전선에서 값싼 평화가 아닌, 피로 사신 진리를 파수하는 충성된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서 발굴된 2,600년 전의 우상 형틀은 가장 오래되고도 가장 내밀한 영적 전선을 우리 앞에 드러낸다. 흙으로 빚은 이 작은 형틀은, 눈에 보이는 형상을 통해 불안을 잠재우고 욕망을 투사하려 했던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을 고발한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눈물로 경고했던 유다의 배교가 고고학적 실체로 드러난 것이다. 오늘날 우상의 형틀은 흙이 아닌 자본과 성공, 이념과 쾌락의 형태로 더욱 교묘하게 우리 마음의 골방에서 주조되고 있다. 교회는 이 영적 전선에서 세상의 풍요를 약속하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선포하는 엘리야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세 개의 전선은 결국 하나의 싸움, 곧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사이의 영적 전쟁으로 수렴된다. 한국 교회는 포화 속에서도 복음의 씨앗을 심고, 혼돈 속에서도 진리의 기치를 높이 들며, 풍요 속에서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시대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역사의 거친 파도가 몰아칠수록, 교회는 세상의 조류에 휩쓸리는 돛단배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의 말씀에 닻을 내린 견고한 방주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린도전서 15:58).
기사 공유하기
추천 0